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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하기 싫은 일은 세상에 널렸다일기 2020. 9. 12. 01:07
아늑해 보이지만 고통으로 가득했던 2018년의 겨울 세상에 힘든 일, 하기 싫은 일은 널렸다. 사람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인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애초에 하기 싫은 일이 더 많다. 엄연히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취향이 있는 인간이라면 모든 일을 좋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하기 싫은 일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가 중요해진다. 늘 짜증과 탄식으로 대할 것인지, 그러다 일에 잡아 먹혀 고꾸라지고 말 것인지. 물론 끝내주게 이뤄낼 수도 있지만. 정답은 과거의 경험에 있었다.
얼마 전 밤에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몇 달 전 나는 외우기 싫은 영어 단어를 하루에 100개씩이나 외우며 고통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즐거움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는 걸까?' 분명히 나는 그때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기 까지'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과거의 고통이 미화된 것이라면 즐거울 순 있어도 그리울 것까지는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와중에 비슷한 기억들이 더 떠올랐다.
중요한 보고서 제작을 앞두고 팀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 허덕이며 작업하던 때, 풀어도 풀어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잡고 씨름하던 때, 제한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을 써서 내야 하는 소위 '양치기' 시험에서 손이 통증과 땀으로 범벅되기 시작하던 때, 그리고 충격적인 연애의 결말을 맞은 후 끊임없이 먹어대다 체중계에서 인생 최고치 몸무게를 마주했던 때...
공통점은 그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나오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사건들 앞에선 곧잘 '고통 속의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역설적이게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상황이 점점 꼬여만 가더라도 허허허 웃음만 나왔다. 실패를 직감해서, 해탈해서,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 상황이 즐거웠다. 도대체 어디까지 꼬여가는 거지? 이쯤 해도 충분히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더 가네? 이게 이렇게 된다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가능성이 내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듯했고, 그게 이상하게도 정말 즐거웠다.
'자기 암시'를 건 것뿐이라는 주장은 피할 순 없다. 그랬을 수도 있다. 인지 부조화에 따른 고통으로 인해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속여 온 것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어쨌든! 나는 충분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즐기는 힘은 도움이 됐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게 없으면 그냥 그런대로. 나에게 닥친 시련과 그로 인한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자 퍽 즐거웠다. '이런 난처한 상황 속에 빠진 내 자신이라니, 정말 흥미진진하다'라고 느껴졌다.
그러자 곧 '어떻게 빠져 나오게 될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영화나 속에서 곤궁 속에 빠진 주인공이 어떻게 상황을 타개해 나갈지 초조한 기대감 속에 지켜보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노력으로 힘을 실어 주기도, 응원해 주기도 하면서 버텼다. 결과는? 모르겠다. 그리고 상관없다. 지금 내게 좋은 기억들로 남았으니까.
최근엔 이런 즐기는 힘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발 딛는 곳마다 패배뿐이고 눈 돌리는 곳마다 절망뿐인 듯 했다. 어쩌면 당신이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며 '도대체 고통을 어떻게 즐기라는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처럼, 그런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두운 골짜기로만 보였다. 문득 떠올린 옛날 기억들이 살포시 다가와 내게 다시 생각해 볼 힘을 주고 갔다.
과거에 가장 심각했던 고민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게 지금 내게 아무런 고민거리가 아닌 것을 깨달으면 지금 마주한 고민 앞에서도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들 말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지나간 역경은 늘 우리를 성장시킨다. 추가로 말하고 싶은 것은 역경 자체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버텨왔던 태도 역시 우리 안에 큰 자산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걸 까먹지 않기 위한 기록의 필요성, 오늘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이렇게 장황하게 일기 아닌 일기로서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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